미국 병원 응급실 체험기

 어젯밤 힐러리 더프가 나온다는 이유로 Cheaper by dozen 이라는 쓸 데 없는 영화를 보다가 11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습니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더군요. 알람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 시간은 새벽 2시 33분, 겨우 세시간 남짓 잠이 들었던 상태였습니다. 전화를 받아보니 해병대원 한명이 심각한 두통과 구토 증상을 보인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아프다는 대원에게 연락을 해보니 꽤나 심각한지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새벽에 부대 안의 클리닉이 열었을리 만무하니 부대 바깥의 민간인 병원에 데리고 가야 했습니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당직병이 운전하는 차에 환자를 태워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새벽인데도 환자들이 꽤 많더군요. 환자를 휠체어에 앉히고 입원수속을 밟고 있는데 손에 들려준 바가지 않으로 맑은 물을 토해내는 통에 다른 환자들보다 약간 더 빨리 입원수속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응급실 안의 복도 한구석에 놓인 침대 위에 환자를 던져 놓았을 때의 시간이 대략 3시 30분 이었습니다.

5시 20분에 간호사가 와서 정맥 주사용 호스를 팔에 연결시키고 피를 뽑은 뒤 사라졌습니다.

5시 45분에 다시 간호사가 나타나 생리식염수를 연결시켜 놓고 사라졌습니다.

6시 15분 마침내 의사가 나타나 몇마디 묻더니 CT촬영이랑 투여할 약을 지시하고 사라졌습니다.

7시 15분에 CT 쵤영이 실시 됬고

7시 45분에 몰핀과 페네르간 이라는 약이 환자에게 투여되었습니다.

8시 15분 반쯤 정신을 놓은 환자 앞에 다시 나타난 의사는 자꾸 잠이 드는 환자를 깨우며 검사결과는 깨끗하지만 아직 동맥류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소거된게 아니니 Lumbar Puncture, 요추천자를 해서 확실하게 하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환자는 마지막 남은 정신을 짜내서 치료를 거부했고 약물투여 후 상황경과에 따라 퇴원 여부를 결정하기로 합니다.

10시 15분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어 의사가 퇴원을 명합니다. 이때부터 서류 작성에 들어갑니다.

11시 30분 서류가 완료된지 약 45분 후, 겨우 시간이 난 간호사에 의해 퇴원 조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의무병인지라 나중에 상부에 어떤식으로 치료가 진행 되었는지 보고해야 할지도 몰라서 밤 세도록 환자 옆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피곤해 죽겠네요. 
 그래도 미국 민간 병원 응급실을 이용해본건 처음이라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이랑 응급실 상황은 다를 게 없네요. 

 그보다 군 병원이랑은 환자를 다루는데 차이가 너무 많이나서 놀랐습니다. 심각한 두통과 구토현상을 가진 환자를 접했을 때 응급실의 의사는 동맥류를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하고 그에 따라 처방을 내렸습니다. 만약 군 클리닉이었으면 토하다가 머리 아픈거라며 페네르간 이라는 항히스타민제 하나 놔주고 하루정도 잠재운 다음에 멀쩡하면 끝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자꾸 요추천자 하자고 설득하는 의사의 모습에서 그레이 아나토미와 하우스에서 나오는 의사들의 모습이 떠올라 혀깨물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는 거죠. 레지던트 쯤 되보이는 이 젊은 의사 양반의 눈빛은 제발 한번만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눈빛으로 보였습니다.
 응급실에서 몰핀 남용하는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냥 꾀병 부리고 들어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쉽게 주네요. 특히 저같은 야전 의무병들은 머리 부상 염려가 있을 때는 절대로 몰핀을 쓰지 말라고 훈련을 받는데 뇌동맥류를 의심하는 환자에게 당당하게 몰핀을 처방하는 의사를 보니 왠지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같은게 보였어요.
 제 환자가 응급환자가 아니었던 고로 계속 밀려오는 위급환자를 먼저 처리하는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단순한 두통, 구토 환자를 8시간이나 걸려서 처리하는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맥도날드에서 스몰 사이즈 콜라 하나 시킨 손님을 하루종일 앉혀두는 거랑 다를게 없잖아요.
 군대에 있으니 치료비까지 공짜네요....라기보다는 월요일에 부대 클리닉에 진단서 가지고 가면 미군 의료보험사에서 대신 내주는 시스템입니다. 예비군 훈련 이제 4일밖에 안 남았는데 어서 빨리 아파야 겠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몰핀 좀 했었는데...

by 단수 | 2008/06/15 02:40 | 미분류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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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praxis' me2DAY at 2008/06/18 00:39

제목 : praxis의 생각
하우스가 뻥이 아니었어 미쿡 대인배 응급실 의사님들.....more

Commented by 통큰아이 at 2008/06/15 07:12
와 해군이군요!! 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전역했습니다.
미국 군함들 볼때마다 부러웠는데.
이라크에 참전하셨다고 하시니..
해병부대에 배치 받으셔서 배는 별로 안타보셨나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단수 at 2008/06/15 07:40
안녕하세요. 예, 저는 해병대 부대에 배치 받아서 배는 한번도 타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통근아이님을 부러워 해야 할 걸요. 배가 타보고 싶어서 간 해군인데 한번도 타본 적이 없어서요. ^^
Commented by 통큰아이 at 2008/06/16 03:15
하하;; 저는 1200톤 초계함 밖에 타지 않아서,

미군의 전투함들은 전부 5000톤 이상이던데 ^^;
Commented by 단수 at 2008/06/16 06:15
그게 어딘가요. 오히려 작은 배 탔던 선원이 더 짜다고 그러던데요. 연안 기뢰제거함에 탔었던 훈련소 교관은 작은 배를 타야 진정한 배를 타본거라 말할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었죠.
Commented by 통큰아이 at 2008/06/16 09:41
하긴... 배가 작으면 작을 수록 롤링과 피칭이 파도가 일렁일때마다 장난이 아니죠.
가끔씩 여름에 출동 나갔는데 저는 멀미가 없지만 다른 일, 이병들 조그만 여름 파도에도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참;;; 파고가 3m가 넘으면 서서히 사람들이 지쳐가죠;;
그래서 배는 큰 배가 좋은겁니다!!(...)
큰 배는 에어콘도 빵빵. 식수 원활. 운동도 가능하고. ㅠㅠ
Commented by 단수 at 2008/06/16 10:08
...작은배의 처절함이 절절하게 전해지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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